JC K이 띄우는 편지/책속의 한줄

며칠째 계속 비만 내려 오늘은 방콕에서 꼼짝않고 예전에 읽었지만 가끔씩 다시 읽어보게 되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책은 읽을 때마다 반성하게 되고 다시한번 내삶을 돌아보면서 책속의 한줄 올려봅니다.

설해목(雪害木)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 왔다. 저녁을 먹은 뒤 발을 씻어라고 대야에 가득 물을 떠다 주었다. 이때 더벅머리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을 들어 주는 데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 천 마디 좋은 말 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고 안 계신 한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게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노사의 모습이다.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꺽인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꺽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한얀 눈에 꺽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꺽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사밧티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 앙굴리말라를 귀의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출처: 책, 법정 무소유 P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