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말, 고마운 말♡♡

“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한 때 탈옥수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창원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매우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새 엄마가 들어왔으나 새엄마는 동생이 아무리 아파도 모른 척했다. 화가 난 신창원이 하루는 부엌칼을 들이대고 오늘 내로 집을 나가라고 협박하였다. 계모는 그날로 집안의 패물을 챙겨 집을 나갔고, 신창원은 아버지로부터 죽도록 얻어맞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서울로 도망갔다가 가출 소년으로 잡히기도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가난한 집안 사정 등으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야단맞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학교를 포기하게 됐다.

6년 뒤인 1982년부터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신창원은 1982년 2월 절도죄로 김제경찰서에 붙잡혔다. 경찰이 훈방 조치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다고 다시 끌고 가서 “소년원에 보내 달라”고 사정해 소년원에 송치된다. 그런데 신창원은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반항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신창원은 소년원에 들어가면서 마음을 돌이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범죄를 배우고 계속해서 범행을 하게 됐다고 한다. 감옥에 한 번씩 갔다 올 때마다 그의 범죄는 나날이 담해졌으며, 결국에는 강력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중학교를 중퇴한 신창원은 1982년 2월 절도죄로 김제경찰서에 붙잡혀 소년원에 송치된 뒤 바로 풀려나 다음해 상경한다. 그 후 음식점 배달원을 비롯한 여러 일을 전전하다 계속 절도죄를 짓게 되고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탈옥을 하게 된다. 훔친 거액의 돈으로 인심을 쓰고, ‘부잣집만을 털고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일기를 통해 신화를 만들어 내며 ‘성공한 탈옥수’를 꿈꾸던 신창원은, 그러나 한 시민의 제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제압하자 마침내 체포되었다.

신창원은 그의 저서  《신창원 907일의 고백》에서 자신이 범죄자가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비를 못 내자 담임 선생님이 “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라고 소리쳤는데, 그 순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악마가 태어났다고 한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하고 머리 한번만 쓸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신창원은 후에 “사회에서 문제아라고 치부해 버린 아이들은 정에 굶주린 불쌍한 애들”이라며 “저 같은 범죄자가 다시는 없게, 사회와 가정에서 문제아들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라며 사회의 관심을 당부하기도 했다.

“연못에 돌을 던지는 사람은 재미로 던지지만 그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는 재미로 죽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선생님의 모욕적인 말 한 마디는 어린 신창원의 마음에 큰 트라우마가 되었고, 심한 모멸감과 반항심을 갖게 만들었다. 살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 깨끗해질 수 있지만, 가슴의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고 아픔을 주는 경우가 많다. 모로코 속담에는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는 말이 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칼이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 혀끝에 맞아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선생님의 모욕적인 말 한 마디는 신창원의 인생을 망쳐놓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우리나라 최고의 외과 의사로 인정받고 있는 이국종 교수는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면서 부유한 삶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가난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게다가 가장인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지뢰를 밟아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인 국가유공자였다. 이국종 소년은 중학교 때까지 학교에 국가유공자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에게 반갑지 않은 이름이었다. ‘병신의 아들’이라고 놀리는 나쁜 친구들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술의 힘을 빌려 말했다고 한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국종 교수는 중학교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다. 치료를 받으려고 이 병원 저 병원 문을 두드렸는데, 국가유공자 의료복지카드를 내밀자 다른 병원에 가보는 게 낫겠다며 내치듯 돌려보냈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 때 이 교수는 아직 어렸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냉정하고 비정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자신을 받아줄 다른 병원을 찾던 중, 그는 자기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의사 한분을 만나게 된다. ‘이학산’이라는 외과 의사였다. 그분은 두 손에는 날카로운 매스를 들고 있지만, 가슴에는 따뜻한 사랑을 품은 의사였다.

그는 어린 이국종이 내민 의료복지카드를 보고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인술(仁術)의 의사 이학산은 진료비도 받지 않고 정성껏 치료해 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 한 마디가 어린 이국종의 삶을 결정하게 했다. 이학산 선생님은 나라를 위해 싸운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으니 진료비도 받지 않겠다 하셨고, 그 후 이국종 소년이 병원에 갈 때마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용돈까지 챙겨주셨다. 이학산 선생님은 모두가 이 교수와 그 가족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등을 돌릴 때, 군말없이 두 손을 내밀어 소년 이국종을 보듬어주면서 차가운 세상에도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소년 이국종은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느꼈고, 그분과 같은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 아픈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살자’라는 대표하는 삶의 원칙도 그 때 탄생했다. 이국종은 가난과 장애로 인해 무시받았던 서러움을 맛보면서 “아픈 사람에게 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이를 실천했다.

이국종은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외과의사가 되었다.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

이것은 그의 대표적인 삶의 원칙이다.

이학산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이국종이 없었을 것이다.

차가운 말 한 마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의 가시같은 말 한 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깊이 생각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고 복된 인생으로 바꾸어 주었다.

– 이한규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