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학지인(不學之人)
불학지인(不學之人) – 배우지 못해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
[아닐 불(一/3) 배울 학(子/13) 갈 지(丿/3) 사람 인(人/0)]
배운 것이 없어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을 不學無識(불학무식)하다고 한다. 배우지 않아 재주가 없고 사리에 어두우면 不學無術(불학무술)하다고 손가락질한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目不識丁(목불식정)이라 문자를 써가며 비아냥대기도 한다. 하지만 지식이 전부가 아니고 살아가는 데에는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가 필요하다.
농사짓는 데엔 고무래 丁(정)자를 몰라도 하등 지장이 없고, 또 다방면으로 전문가가 많아진 오늘날 조금 안다고 우쭐거릴 일은 더욱 아니다.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이 도리어 억지스런 행동이나 정의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것이 더 不學(불학)이다.
너무나 뜻이 단순해 고사가 없을 것 같은 不學이 春秋時代(춘추시대) 각국의 역사를 수록한 ‘國語(국어)’에 처음 나온다.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人不可以不學/ 인불가이불학)’면서 사람에게 배움이란 마치 나무에 가지와 잎이 있는 것과 같다(人之有學也 猶木之有枝葉也/ 인지유학야
유목지유지엽야)고 강조한다. 晉語(진어) 9편에 있다.
栗谷(율곡) 李珥(이이) 선생의 초학자들을 위한 책 ‘擊蒙要訣(격몽요결)’ 서문엔 성어대로 실려 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마음의 바탕이 좁아 답답하며 식견이 매우 어둡다(但不學之人 心地茅塞 識見茫昧/ 단불학지인 심지모색 식견망매).’ 茅는 띠 모, 茫은 아득할 망.
이보다 더욱 일목요연하게 말한 사람이 있다. 조선 후기 영조, 정조대의 문신 成大中(성대중)은 ‘醒言(성언)’이란 글에서 이렇게 일침을 놓는다. ‘귀하다고 교만해지고 젊다고 방자해지며, 늙었다고 나약해지고 가난하다고 초라해지는 자는 모두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貴而驕 壯而肆 老而衰 窮而悴
皆不學之人也/ 귀이교 장이사 노이쇠 궁이췌 개불학지인야).’ 肆는 방자할 사, 悴는 파리할 췌.
배움이 가방끈의 길이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인격과 품성, 삶에서 오는 지혜에 의해 나타난다. 최고의 학력을 지니고 큰 권한을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사회 지도층의 불법과 탈법을 보면 참으로 헛배웠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더 큰 원인은 국회의 헌법과 법률을 예사로 무시하고 있는 데서
나온다. 이들을 국민의 매로 따끔히 가르칠 수 없을까.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