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행복할 거라고 믿는 제 남편은 ​책장을 넘기듯 하루 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며 새벽을 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경상도 토박이하고도 뼛속까지 경상도 피가 흐르는 그런 남자라서 그런지 15년을 같이 살고 있지만, 사랑한다는 소리 한번 못 들어 봤답니다. 멋대가리가 없어도 너무 없다 보니 집에 와도

​“내 왔다”“밥도”“불 꺼라”세 마디 이상 들어본 적이 없고요. 어제는 멍하니 TV만 보고 있는 남편 옆에서 과일을 깎으며,

“여보…. 요즘 회사 일은 어때요?”라고 물어도 제 얼굴을 한번 빤히 쳐다보고는 티브이만 보고 있더라고요. 그때 온종일 울려댈 줄 모르는 남편을 닮은 전화기가 울먹이는 소리에 냉큼 전화기를 들은 남편의 입에서

​“어무이요! 밥 잡샤습미꺼?”“—–“ “그 뭐시라꼬예 돌아오는 토요일 지수 오매하고 내려가서 퍼떡 해치우겠심더“​하고는 전화기를 끊더니

​“들었제?”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더라고요

​ 저는 낮에 뜬 달처럼 어이가 없고 기가 찼지만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기에 아내의 본분을 다하고자 과일을 들고 방으로 따라 들어갔지만, 본척 만척 티브이에 나오는. 개그맨들이 내는 퀴즈를 들으며. 웃음보를 잡고 있더라고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경상도 버전으로 다섯 자로 줄이면?“ 남편은 놓칠세라

“사랑한데이”라고 허공에 질러대는 소리에

​“어 당신 잘 알면서 어찌 나한텐 한 번도 안 해주나 몰라”라는 제 말은 들은 건지 안 들은 건지 다시 텔레비전에 몰입하던 남편은

​“두 자로 줄이면?”이라는 소리에 저는

“뭐지…? 뭘까…?”라며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때 남편은 큰 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알제?. 아이가…. 하하하“ 맞춘 자신이 대단하다는 듯 큰소리 내어 웃더니. 리모컨을 사정없이 눌러 꺼 버리고는

​“불 꺼라”집에 와서 제일 마지막에 하는 그 말을 어둠이 배어 있는 천장에 뱉어놓고 있을 때 제 마음은 주머니 속 동전처럼 작아지고만 있었답니다.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라는 듯 멈춰서지 않는 시간들이 흘러 지나간 어느 날 약속을 한 새끼손가락처럼 아침을 열고 나가는 남편의 입에서

​“오늘부터 내 좀 늦을끼다“ “늦게까지 한다고 못 버는 돈이 더 들어오려나 몰라”라고 빈정대는 제말은 아랑곳 없이 구름 속에 사연을 숨겨둔 사람처럼 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한 계절이 머물다간 하늘 위로 햇살이 숨겨둔 물감이 나오는 가을을 따라 빽빽한 책장 한 장 넘긴 자리를 더듬어 찾아온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띠리리리..“ 아침 일찍 걸려 온 엄마의 전화를 안방으로 들어가 받고 있던 저는 빛을 향해 뻗어 가는 새순처럼 엄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대롱대롱 눈물방울을 매달고 말았습니다

​ 남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옷소매로 눈물을 지우며 거실로 나온 제 가슴에 땅속에서 숨죽인 시간을 걸어 피어난 파란 새싹 같은 꽃송이를 한 아름 안겨주더니

​“생일 축하한데이…”회사를 마친 남편은 한 달여일 동안 엄마가 있는 병실로 찾아가 병간호를 하고 있었고 돈이 없는 오빠 대신 퇴원 병원비까지 계산했다는 엄마의 말에 저는 남편의 가슴에 안겨 못다 흘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여보…. 고마워“ “그게 고마운 일이가…? 당연한 일이제….“

​​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내 남편이 오늘도 책장에 한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여보…등때기가 와이리 무겁노”“잠깐만..등 뒤에 뭘 이런 걸 부치고 다녀요“​라며

흰 봉투를 떼어 열어본 순간 제주도 여행권 두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아니 여보 이게 뭐예요?”사랑을 사랑한 사람처럼 웃어 보이더니

​“아프셔서 칠순을 그냥 병원에서 보내셨는데 당신이 모시고 제주도여행 한번 다녀오라꼬” “여보…. 정말…. 정말.. 고마워요 근데 당신 오늘 내 생일인데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갈 거예요?”라며 배고픈 우체통처럼 내뱉는 저를 피해. 도망치듯 문을 열고 나간 남편이 다시 문을 빼꼼히 열고 선 한마디를 뱉어놓고 있었습니다

​“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