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과 극락은 있는 것일까

어느 무사가 하쿠인 선사를 찾아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난 뒤 “스님, 지옥과 극락은 정말 있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다. “바보 같은 놈. 지옥과 극락이 있는 장소를 묻다니. 이 애숭이 무사야, 죽어 보아야 알지 않겠느냐?” 비웃듯이 말했다.

무사는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선사의 말에 화를 내면서 “아무리 선승이라고 하지만 나를 조롱하다니 가만 둘 수 없다.”고 하면서 선사를 향해 칼을 날렸다. 선사는 칼날을 가볍게 피하면서 무사를 더욱 조롱했다. “겨우 그런 솜씨로 칼을 차고 다니다니 정말 한심하구나.”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무사가 칼을 더욱 세차게 휘둘렀다. 역시 칼날을 가볍게 피한 선사가 말했다. “자 이제 알겠느냐. 화를 내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지옥이니라.”

순간 깨달음이 온 무사가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스님,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소서.” 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지금 그 자리가 바로 극락이니라.”

하쿠인 에카쿠는 1685년 일본의 시즈오카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하였다. 24세 때 종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는 책을 집필하였다. 50세부터 죽기까지 대중포교에 노력하여 일본 선종의 대중화와 임제종의 중흥에 큰 역할을 하였다.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를 극락이나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하는 일화다. 실수가 있거나 잘못이 있어도 참회하고 바르게 살기 위해 깨달으면 극락을 만들수 있다는 것도 알수 있다.

나쁜 짓을 상습적으로 하고도 참회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지옥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업(業, karma)은 있는 그대로 쌓이고 언젠가 작용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동네 처녀 하나가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 집안이 난리가 났다. 누구 자식이냐며 다그치자 하쿠인 스님 자식이라고 하였다. 처녀 부모가 하쿠인 스님을 찾아가 온갖 욕을 하면서 다그치자 “그래요?” 한 마디 뿐이었다.

처녀가 아기를 낳자 처녀의 부모는 아기를 하쿠인 스님에게 데려다 주었다. 스님은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동냥젖과 탁발로 아이를 정성껏 잘 키웠다.

한 해가 지나자 자기 아이가 보고 싶고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던 처녀가 부모에게 이실직고 하였다. 아기의 아버지는 부모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는 청년이라고 하였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부모는 스님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아기도 데려가겠다며 거듭 사죄하였다. 목묵히 듣고 있던 스님은 “그래요?” 한 마디 뿐이었다.

이것은 하쿠인 선사가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쿠인 선사는 종소리를 듣고 깨달음이 왔는데, 더 큰 깨달음은 마당을 쓰는 노파에게 빗자루로 맞고 난 뒤에 왔다고 한다. 서산대사는 한 낮의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진면목을 깨달았다고 한다.

누구든지 어떤 계기로 깨달을수 있는데 깨달음이 오려면 우선 배우려는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 배움의 지극함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깨달음이 온다고 한다.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은 “증오와 애정을 끊어버리면 모든 것이 명백하게 그 실체가 보인다”는 말이다. ‘지유즉리 이유즉각(知幼卽離 離幼卽覺)’이란 “어리석음을 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란 뜻이다.

자기중심성이 높은 사람은 깨달음이 오기가 어려운 이유는 명백하게 상황이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 위주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려할 줄 모르고 주기보다는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정저지와가 되어 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모르고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깨달을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느 신부님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다. 하늘나라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고 앉아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문을 받지않았다. 그래서 왜 주문을 안받느냐고 짜증을 내면서 물어 보았다. 그러자 종업원이 “예 신부님 여기는 셀프입니다.”라고 말했다.

신부님이 둘러보니 저 쪽에는 사람들이 주문도 받고 서빙도 해주는게 아닌가. 그래서 신부님이 왜 저 사람들은 해주느냐고 물었더니 “저 분들은 평신도들입니다. 신부님은 이승에서 대접을 많이 받고 살았으니 여기에선 셀프이고 평신도들은 이승에서 많이 봉사했으니 여기에선 대접받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신부님이 아무 말을 못하고 있다가 얼마 전 교황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교황님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예, 교황님은 지금 배달가셨습니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어느 주교님께서 신부님들께 한 강의 중의 이야기라고 한다. 배려하고 봉사하는 삶이 업보로 사후에도 연결됨을 시사한다.

의무나 책임보다는 우선적으로 권리를 먼저 생각하고 배우는 교육의 영향으로 자기중심성이 높은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교육을 어떻게 하면 서로 배려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많아질수 있을까? 배움의 자세가 지극하여 깨달음을 체득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배움의 자세는 차동엽 신부의 <무지개 원리> 책에 잘 나와있다.
ㅡ2023년 4월 21일 경남매일신문에 실린 글
지옥과 극락은 있는 것일까 – 경남매일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17387

ㅡ깨달음이 오려면 배우려는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한다. 차동엽 신부의 <무지개 원리> 책에 있는 ‘배움’의 자세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요. 좋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 역시 고귀한 사람이다.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좋은 말을 가슴속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다.”

지혜의 씨앗을 모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배움이다. 배움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려는 자세다.

플라톤이 진정으로 좋은 스승인 철학자를 만났다며 기뻐하는 철학도에게 물었다. “이제까지 당신의 스승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까?” “그들에게는 배울 만한 것이 많지 않다고 여겨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스승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지식은 배울지 몰라도 지혜는 배우지 못하는 법이다. 배움의 자세를 지닌 사람은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다.

시인인 랠프 에머슨이 하루는 아들과 함께 송아지를 외양간에 넣으려고 하였는데 꿈적도 하지 않았다. 지쳐서 주저 앉아 있을 때, 늙은 하인이 자기 손가락 하나를 송아지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러자 송아지는 순순히 따라갔다.

그 순간 에머슨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런 방법도 있었구나! 오늘 나는 참으로 소중한 두 가지를 배웠다. 어떤 문제도 해결책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과 하인도 나의 스승이 된다는 사실을.’ 이후 에머슨은 언제나 겸손했다.

이스라엘의 명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