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버타운 老夫婦의 ‘불간섭 평화 협정서’^♡♡
실버타운 안에서 내게 삼겹살과 소주를 사겠다는 노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나이가 팔십이고 부인은 몇 살 어리다고 했다.
지금도 부부 싸움을 하는데 변호사니까 얘기를 들어보고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편안히 살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했다.
노부부는 이혼을 하겠다고 시골 지서를 갔다고 했다.
그곳 순경이 법무사를 찾아가라고 해서 법무사 사무실을 갔더니 얼마 남지도 않은 인생 그냥 사시다가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노부부와 함께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기를 놓고 사적인 조정재판을 시작했다.
먼저 남편 노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애들 교육시키고 결혼시켜 내보낼 때까지 같이 오십 년을 살았어도 직장에서 바쁘고 하니까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늙어 실버타운에 와서 둘이서만 사니까 안보이던 게 보이는 거예요.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안이 좁아서 신발을 놓을 자리가 없어요.
그러면 신발을 옆의 신발장에 잘 정리하면 될 텐데 이것저것 그냥 포개놓는 거예요.
냉장고나 냉동고를 열어보면 음식물을 겹겹이 쌓아놨는데 아래는 벌써 상한 것들이예요. 그리고 이제 나이를 먹었으면 돋보기나 자기가 쓰는 물품들은 손이 가는 옆에 잘 정돈해 놨다가 바로 쓸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번번이 찾는 거예요. 그리고 벌컥벌컥 성질을 내고 말이죠.”
그 말을 듣고 있던 부인 눈빛에 날이 선 것 같았다.
일단 열을 식힐 필요가 있어 노인 부부에게 말했다.
“고기가 다 구워졌으니까 한 점씩 드시고 사이다 한 잔으로 속을 푸신 후에 말씀을 계속 듣도록 하죠. 잡수신 다음에는 부인이 진술하실 차례입니다.”
달콤 짭짤한 명이나물 위에 구워진 삼겹살 한 점과 쌈장에 찍은 생마늘을 놓고 싸서 입에 넣은 후 와삭와삭 씹어 삼켰다.
남편인 영감은 소주 한 잔을, 부인은 사이다 한 잔을 들이켰다. 잠시 후 부인이 말을 시작했다.
“남편이 직장에 다닐 때는 떨어져 산 적이 많아요. 그러다가 같이 살아보니까 이제야 단점이 보이는 거예요.
남편이 조금 도와주고는 너무 공치사가 많아요.
생색을 안 냈으면 차라리 고마운 마음이 들 텐데 말이죠.
영감이 냉장고만 열면 숙제 검사 받는 것 같이 가슴이 덜컥해요.
돈벌어 올 때 유세를 하던 걸 참고 나 혼자 일했었는데 이제는 돈도 못 벌잖아요?
그러면 일도 나누어 같이 해야 하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도 예전같이 똑같이 유세를 부리려고 하니까 나도 화가 나죠.
처음에는 말다툼을 하다 소리가 높아지고 그래서 실버타운 뒷산에 가서 싸운 적도 있어요.
남편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바지런한 성격이예요.
뭔가 해야 해요. 나하고는 성격이 틀려요.”
그 말에 남편인 영감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럼 나는 매일 마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 없으리로다라고 감사 기도해야 하나?
이제 변호사님이 판결을 내려 보슈.”
부인이 대응할 눈치였다.
내가 끼어들어 의견을 제시했다.
“두 분 나이면 이혼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불간섭 평화 협정서’를 쓰시면 어떨까요.
그걸 써서 두 분이 한 장씩 가지고 수시로 그걸 읽어 보면서 협정 내용을 지켜야 하는 겁니다.
필요하면 제가 내용을 법조문같이 써드릴께요.”
“그거 괜찮으네. 어떤 내용의 협정인가요?”
노부부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 됐다.
“제1조, 늙고 병든 서로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감싸준다.
제2조 일을 나누어 하고 그 결과를 보고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제3조. 가치관이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 주장만 옳다고 우기지 않는다.
제4조. 부부라고 하더라도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의 세계에 몰입하며 시간적·공간적으로 독립한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미리 혼자가 될 때를 대비하도록 한다. 이 정도면 어떨까요?”
노부부는 둘 다 찬성했다.
덕분에 삼겹살 파티에 초청받아 저녁을 잘 얻어먹었다.
실버타운은 세상을 흐르다가 바다 가까이 있는 강의 하류 같은 곳이다.
그곳에 모인 물방울 들이 서로 흘러온 사연을 얘기한다.
나는 강둑에 서서 그 강물들에 내 마음을 비추어 보고 있다.
실버타운 안에는 혼자가 된 노인과 부부가 사는 노인이 반반쯤 되는 것 같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인이나 남편이 바로 죽는 경우도 보았다.
노인들은 남은 세월이 정말 빨리 흘러가는 것 같다고 한다.
노인들은 요양원에 가서 침대 위에서 근육이 다 녹아 없어지는 사멸의 과정을 겪고 싶지 않다고 한다.
삼겹살집에서 나와 어둑어둑해지는 해변길을 그 노부부와 함께 걸었다.
부인은 조금 앞에서 혼자 걷고 있었다.
남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집사람이 많이 아파요.
나도 여기저기 몸이 고장나고 고장난 기계같이 녹물이 흘러나와요.
내가 아내를 잘 보살펴서 저세상으로 보내고 따라가려고 해요.
아내가 아프니까 성질을 내는데 나도 늙어서 그런지 인내하지 못하고 부딪치는 경우가 많아요.”
노부부에게는 굼뜬 구둘목 같은 따뜻한 온기가 있는 것 같았다.
엄상익(변호사 글)